AR은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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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은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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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eepada | Edited by @syntaxional

헤드셋 제조사들이 내놓은 AR 데모 영상은 늘 비슷한 장면으로 끝납니다. 거실 소파에 앉은 사람이 허공에 띄운 창을 손짓으로 옮깁니다. 스마트 글래스 프로토타입도 같은 약속을 합니다. Always-on AR.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들어온 약속은 대체로 이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들이 돈을 내고 쓰는 AR 디바이스를 살펴보면 풍경이 좀 다릅니다.

1. 수영장과 슬로프에 도착한 AR

Source: ChatGPT

캐나다 회사 Form이 만든 Smart Swim 2 Pro는 수영 고글입니다. 렌즈 한쪽 구석에 작은 AR 디스플레이가 박혀 있고, 그 위에 거리·페이스·심박수·스트로크 레이트가 실시간으로 뜹니다. 관자놀이 쪽 광학 센서가 수영 중에도 심박을 읽어내고, 벽에서 턴할 때마다 직전 구간의 속도가 잠깐 떠올랐다가 다시 누적 데이터로 돌아옵니다.

한 번 충전하면 14시간, 렌즈는 Corning Gorilla Glass 3로 만들어 자외선을 98% 차단합니다. 다섯 개의 대시보드를 미리 만들어두고 버튼 한 번으로 전환할 수 있어, 인터벌 훈련용·기술 분석용·심박 중심 훈련용을 그날 운동에 따라 바꿔 쓸 수 있습니다.

진짜 핵심은 그 위에 얹힌 소프트웨어와 구독입니다. 기본 트래킹은 무료지만, 연 99달러 수준의 Premium을 구독하면 1,500개가 넘는 가이드 워크아웃, 머리 각도와 자세를 분석해주는 HeadCoach, 종이에 적힌 훈련 메뉴를 사진으로 찍으면 그대로 고글에 띄워주는 Script Workout Builder, 그리고 오픈워터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디지털 컴퍼스 SwimStraight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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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ningPeaks·TriDot 같은 트라이애슬릿용 코칭 플랫폼과도 연동돼, 멀리 떨어진 코치가 짠 훈련을 그대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Form이 공개한 자체 데이터에 따르면 Premium으로 구조화된 워크아웃을 따른 사용자가 그렇지 않은 사용자보다 1.4배 더 빠르게 기록을 단축한다고 합니다. 측정 디바이스라기보다 고글에 박힌 코치에 가까운 제품인 셈입니다.

이게 단지 신기한 시제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게 중요합니다. 2019년 1세대 출시 후 Red Dot Product Design Award를 받았고, 작년 연말에는 Apple Store 매대에 올랐습니다. 프로 트라이애슬릿 Richard Murray 같은 선수가 일상 훈련 장비로 쓰는 모습이 공개돼 있고, 수영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민 시계와 비슷한 결의 표준 도구로 자리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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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결의 시도는 스키에서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스위스 스타트업 Provuu는 스키 고글에 AR을 넣어, 화이트아웃이나 그늘 같은 저시야 환경에서 슬로프 굴곡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겠다는 컨셉을 제시했습니다. 아직 Kickstarter 단계의 초기 제품이지만, 같은 패턴이 다른 종목으로 번지고 있다는 작은 신호로 읽힙니다.

2. 배송 기사에 도착한 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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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atGPT

작년 가을 Amazon이 공개한 스마트 글래스도 비슷한 결입니다. 내부 코드명 ‘Amelia’로 알려진 이 제품은 배송 기사(Delivery Associate)를 위한 전용 디바이스입니다. 운전 중에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차량을 세우는 순간 글래스가 켜지고, 짐칸 안에서 다음 집에 배달할 박스들이 초록 단색 디스플레이 위에 강조됩니다.

박스를 집어들면 자동으로 스캔되고, 시야 한쪽의 체크리스트가 갱신됩니다. 양손에 박스를 든 채 걷는 동안에는 보도 위로 디지털 경로가 그려지고, 현관에 도착하면 사진 촬영으로 배송이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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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에 참여한 오마하의 한 기사는 정보가 시야 안에 있어서 더 안전하게 느꼈다고 말합니다. 휴대폰과 박스, 주변 환경을 번갈아 보지 않아도, 시선을 앞에 둔 채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 보도에 따르면 내년 10만 대 이상 출하가 검토되고 있고, 이는 단일 MicroLED 디스플레이 주문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디바이스가 보여주는 그림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초록 단색 디스플레이, 배송 한 건당 몇 초를 줄이는 정도의 목표, 운전 중에는 아예 꺼져 있는 좁은 작동 범위. 손에 박스를 든 사람이 휴대폰을 꺼낼 수 없는 그 짧은 순간에 정확히 들어맞는 도구입니다.

3. 쓰이는 제품의 세 가지 공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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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atGPT

세 디바이스 모두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AR의 모습, 화려한 3D 오브젝트, 공중에 뜬 앱 창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대신 셋이 공유하는 게 있습니다.

첫째, 손이 자유로워야 하는 순간입니다. 배영을 하는 사람은 손이 물을 가르고 있고 시선은 천장에 고정됩니다. 손목시계도, 풀 끝의 라인도 볼 수 없습니다. 스키어는 폴을 쥐고 있고, 화이트아웃 속에서 휴대폰을 꺼낼 여유가 없습니다. 박스 두세 개를 들고 아파트 복도를 헤매는 배송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에 다른 일이 묶여 있을 때 정보를 시야 안으로 끌어오는 것, 그게 AR이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둘째, 기존 웨어러블의 측정으로 풀리지 않는 정보입니다. 가민, 애플워치, 오우라 링은 지난 10년간 우리에게 거의 모든 숫자를 줬습니다. 페이스, 심박, 회복도, VO2 max. 측정의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 끝났습니다. AR이 더하는 건 새 숫자가 아닙니다. 벽까지 남은 거리, 지금 가는 방향이 직선인지, 내 앞 슬로프의 굴곡이 어디서 꺾이는지, 어느 박스가 다음 집의 배송품인지, 손목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공간 안의 맥락입니다.

셋째, 짧은 순간입니다. 수영 한 시간, 스키 반나절, 배송 한 건당 몇 분. AR이 always-on일 필요가 없습니다. 활동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그 시간 동안만 켜지면 됩니다.

이 패턴을 정리하면 묘한 그림이 나옵니다. AR이 처음 안착한 곳은 거실도, 길거리도, 사무실도 아니었습니다. 손이 묶이고, 기존 웨어러블의 측정으로 안 풀리고, 시간이 짧은, 아주 좁고 구체적인 순간이었습니다.

4. 잘 팔리는 글래스의 진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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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atGPT

흥미로운 건 컨슈머 글래스 시장에서 실제로 잘 팔리는 제품들도 비슷한 결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Ray-Ban Meta는 4월 처방용 모델 출시까지 가며 자리를 잡았지만, 이 제품에 always-on AR 디스플레이는 없습니다. 카메라, 오디오, 필요할 때 부르는 AI라는 좁고 구체적인 도구로 안착했습니다. Vision Pro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꼽는 활용처도 비슷합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용 사례는 노트북을 무선으로 연결해 거대한 가상 모니터로 띄우고 작업하는 것입니다. 출근길까지 따라가는 일상 레이어보다는 책상 앞에서 켜는 거대한 컴퓨팅 환경에 가까운 디바이스로 자리잡았습니다.

형태도 가격대도 쓰임새도 다르지만, 수영 고글에서 스키 고글, 배송 글래스를 거쳐 Ray-Ban Meta와 Vision Pro에 이르기까지 패턴은 이상하리만치 일관됩니다. 모두 특정한 순간에만 의미 있는 디바이스로 안착했습니다. 깨어 있는 16시간 내내 켜져 있는 일상 레이어, 헤드셋 제조사들의 데모 영상이 약속하는 그 모습은 지금 사람들이 글래스를 쓰는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이 좁은 사용이 AR의 종착지일까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5. 좁게 쓰인 다음, 합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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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앞으로 AR 글래스는 어디로 갈까요. 단기적인 방향은 이미 보이는 듯합니다. 하나의 종목, 하나의 직무, 하나의 환경에 정확히 들어맞는 좁고 뾰족한 도구로 먼저 자리를 잡는 것. Form, Provuu, Amazon이 그리는 그림이 바로 그것이고, 한동안 새 AR 글래스들은 이 결을 따라 등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게 최종 모습은 아닐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을 떠올려 보면, 그 등장 전에 우리는 이미 분리된 기기들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전자사전으로 단어를 찾고,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각자의 도구가 일상에 자리잡은 다음에야,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은 디바이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스마트폰은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분리돼 있던 도구들이 하나의 폼팩터로 합쳐질 준비가 됐을 때 도착한 디바이스에 가깝습니다.

AR 글래스도 비슷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큽니다. 수영장에서, 슬로프에서, 배송 트럭에서 사람들이 글래스라는 폼팩터에 익숙해지고, 각각의 좁은 유즈케이스가 충분히 검증된 다음에야 그것들을 하나로 묶은 올인원 디바이스가 들어설 자리가 만들어집니다. 현재 빅테크의 헤드셋과 글래스들이 가리키는 always-on AR은 그 마지막 정거장에 가깝습니다. 지금 그곳으로 곧장 가려는 시도는, 어쩌면 MP3와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에 스마트폰부터 만들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수영 고글이 상용화 단계에 먼저 도착했다는 건 그 자체로 작은 힌트입니다.

AR은 일상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일상은 AR에게 어쩌면 가장 마지막에 풀릴 문제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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